[스크랩] 탐욕,금융 투기의 역사 1 (프랑스 18C 경제붕괴,존 로,오를레앙 공)
1715년경 프랑스는 루이 15세가 등극할 무렵 태양왕 루이 14세의 사치와
전쟁비용으로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가채무 20억 리브르(2009년 현재 가치 약 9800조원)
(미국의 2008년 말 채무 1경 7000조원,미국 년 예산 4천조 ,
1일 이자 1조5천억원 ,1년 이자 547조원( 금리 년 5.2%)
재정적자 규모 2008년 357조원,09년 1358조, 10년 1575조, 11년 116조원)
세수 1억 4500리브르
예산 1억 4300리브르(2009년 현재 가치 약700조원)
년간 이자지급액 9000만 리브르(금리 4.5%,현재가치 440조원)
루이 15세의 삼촌 오를레앙공이 섭정으로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지만 국가재정의 황폐로 인해 힘들어 했다.
오를레앙공은 국가 재정타파의 대안으로
가.국가파산
나.세수인상
다.주화교체(주화의 금/은 함량의 축소)
라.특정 이권의 판매(상품,식민지 교역권)
마.부패 공무원 재산 몰수(나쁜 놈 만들어서 관심 돌리기) 를 고민하던 중
다,마항과 채택하여 실시한다.
다항 주화의 금/은 함량을 80%로 축소. 예산 기여도 7000만리브르(9.3개월분의 이자 상환금)
=.21세기에서도 금융위기를 타파하고자 선진각국은 종이화폐를 무너기로 발행하여
종이화폐가치를 하락시키고 있다.
마항 부패 공무원 재산 몰수 8000만 리브르(10.6개월의 이자 상환금)
1억8000만 리브로를 몰수 했지만 포상금, 하사금으로 1억 리브르를 지출(국민들 인기 기)
=.실무에 자신이 없는 말밖에 할줄 모르는 정권은 희생양을 만들어 위기의 주범으로 모는데,
18세기, 프랑스 정부는 부패관리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을 보며는
21세기에 대한민국을 통치하면서, 열심히 일한 노년층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지난 2번의 우리 나라정권 보다는 나았다.
그럴 즈음인 1716년에 에 존 로(John Low1671-1729)라는 스코트랜드 에른버르(아담 스미스의 고향)출신의
풍운아가 나타나서 오를레앙 공에게 종이화폐를 발행하라고 한다.
그는 회계사인 부친의 밑에서 은행일을 배웠고
부친사망이후 많은 재산과 함께 노름으로 살아 갔고 노름을 해서 돈을 잃지 않을만큼 명철했으며,
180센티의 약간 곰보인 미남형이었다.
그는 결투에서 사람을 죽이고 네덜란드,프랑스,이태리등에서 도피와 노름으로 생활을 하던중
1715년 오를레앙공을 만나게 되었고 유랑의 생활에서 당시의 금융 시스템을 완벽히 터득한다.
그 때 그는 이미 부자였다.
그는 그 무렵 이전에 종이화폐 발행 정책을 영국과 이태리에 건의 하기도 했고
영국국회에서 종이화폐 발행을 격렬히 논의 할 정도였으니 그의 학문적 지식은 깊었다.
(일부 백과사전에서는 그를 아담 스미스 이전세대의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로 평가한다.)
1716년 오를래앙 공은 심각한 재정적자를 만회하고자 존 로의 의견을 받아드려서
존 로로 하여금 로&컴파니 은행을 설립토록 한후(자본금 600만 리브르),
종이화폐(지폐)를 발행하게 하고
로&컴파니의 주식은 주화 25%,토지권 75% 로만 구입할 수 있게 법을 만든다.
토지권이란 루이 14세의 재정적자로 인해 발행한 왕립 채무증서로서
당시는 정크펀드로 취급을 받아서 액면가 21.5% 수준에 거래가 되었다.
하지만 거의 파산에 이른 국가임에도 토지권이 통용되었던 이유는
매입금액은 액면가의 21.5%임에도 이자는 액면가의 4.5%이므로,
실질금리가 년 20.9%나 되는 펀드였다.
그리고 로&컴파니는 지폐를 발행 할 때 주화로 바꿀수 있는 일람불식의 방법을 채택하므로
로&컴파니 은행의 지폐는 발행 직 후 액면가 대비 115%나 절상되어 통용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오를레앙 공은
1718년에 로&컴퍼니 은행을 Banque Royal(왕립은행)으로 상호 변경하고
금/은 정련 독점권을 왕립은행에 부여 했고,
1719년에 존 로가 무역회사를 설립하게 하고
그 회사에 미시시피 및 루이지애나 식민지 교역 독점권을 준다.
그 회사는 식민지 교역에 엄청난 특혜를 받게 되고
(아메리카,세네갈,중국,동인도회사),
왕실 주화 독점권 , 국세징수권, 담배전매권도 부여 받게 되며
상호를 ‘인도회사’로 바꾼다.
그 과정에서 주식청약을 받으면서
1차 청약시 2500만 리브르를 청약받았으며
자산을 1억 2500만 리브르로 계상하면서
(분식회계 ; 21세기 역시 미국 앤론사은 분식회계를 했고,
한국역시 최근까지 분식회계가 기업생존이라는 명제아래 정당화되곤 했다)
투자수익율을 년 40%를 약속한다.
공모 조건은 루이 14세 토지권로만 주식을 매입할 수있게 한다.
예로 들면 ,액면가 500 리브르의 한 주를 사기 위해서는
토지권 액면가 500리브르가 필요하지만
실제 토지권 구입가격은 최저 107.5리브르에 구입할 수있고
토지권 구입비 107.5리브르로 주식 500리브르 어치를 살 수 있었다.
거기다가 매년 40%의 배당을 받을 수 있으니 (200리브그)
년간 실질 수익은 200% 가까이 될수 도 있었다.
그래서 청약비율은 600%가 되었고
존 로는 폰지 사기숫법을 이용하여 40%나 되는 배당금을 수년간 지급했다
(2009년 6월 미 법정은, 앞 투자자의 배당금을 뒷 투자자의 투자금으로 지급하는 폰지 숫법을
사용한 前 미 나스닥 중권거래 위원장 출신의 메이도프에게 150년형에 220조의 벌금을 추징 했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많은 금융,부동산,소비재,경조회사등 무수한 다단계가 있다)
재차 2차 공모를 시작하여
최초 공모 2500만 리브르의 12배인 15억 리브르의 주식을 재차 공모한다.
2차 청약에서는 300%의 청약비율을 기록한다.
(당시 종이화폐 발행액이 11억 리브리였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청약이다)
이 과정에서 루이왕가의 채무는 급속히 소멸한다.
그 무렵 왕립은행과 인도회사의 인근 사무실은 임대료가 15배나 폭등을 하고
인도회사 주식은 시세의 34배나 오르고(1주 가격 500리브르->18000리브르)
프랑스는 경기가 활성화 되고
소비열풍이 물어서 옷,마차, 가구, 각종 보석류,사치품의 유통이 증가하고
주택신축도 늘어났으며
임금역시 4배나 인상 되는등, 엄청난 경기 호황을 누린다.
(지금도 주식에 부동산값이 오르면 경기는 살아난다.)
그러면서 회사의 가시적 활동을 보여주려고
미시시피에서 금도 캐고 식민지 경영을 한답시고
이주민을 보내었는데 이주민이 미시시피에 가서 3년 이내 3/4이 죽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그 소식이 프랑스에 전해지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려서 계속 환상은 지속 되었다.
- 미시시피 식민지 모습 -
그러던중 루이 15세의 장조카 콩티왕자가 인도회사 주식을 사려 했으나 거절을 당하자
홧김에 그가 소유한 모든 지폐를 들고 왕립은행에 나타나서 주화로 환전을 요구했고
그는 왕립은행 보유 주화 40%정도인 마차 2대분의 주화를 갖고 돌아가지만,
오를레앙 공의 진노로 다시 주화 2/3를 반환 한다.
하지만 생각이 깊은 투자가들 사이에는
"모든 지폐보유자가 주화로 일람불을 요구 할 경우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일부 투자가는 지폐를 주화로 조금씩 교환하여 금과 은을 매입한 후 영국,네덜란드로 빼돌리기도 하고....
오를레앙 공은 지폐 가치의 보존을 위하여 평가절상을 5%하고
얼마후 다시 5%를 절상한다.
또한 개인이 주화를 500리브르이상 가지지 못하도록 법령을 만들면서
지폐의 유통정착을 시도한다.
그 전에는 발행지폐가 11억 리브르였지만
1720년에는 지폐발행을 통한 경제활성화를 계속 유지하고자
추가로 15억 리브르의 지폐를 발행하여 지폐통화는 26억리브르가 된다.
존 로의 친구중에 캉티옹이란 Banker가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가다가 언젠가는 프랑스 지폐가 가치절하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는
프랑스 리브르로 대출을 받아서 영국 화폐에 투자를 한다.
그 소식을 전해듣은 존 로는 캉티옹에게 '48시간이내 프랑스를 떠나라.그렇지 않으면 바스티유감옥에
갖둬 버리겠다" 경고를 하여 캉티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가증권을 부랴부랴 팔아서
영국으로 피신을 하지만 그가 그 동안 프랑스에서 빼돌린 돈은 거의 천문학 숫자은 2000만 리브르에 가깝다.(당시 프랑스 국가예산의 14.3%) (하지만 존 로 역시 프랑스 최고의 부자였으며
최고로 많을 때는 프랑스 1년 예산의 70%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 정도의 부를 보유 한 적도 있었다)
1994년에도 조지 소로스는 영국화폐의 절하를 통해 몇달만에 1조2000억원을 벌었다.
또한 요즘도 작전세력의 일부가 작전주를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배반을 하고 주식을 팔아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미시시피 식민지 의 실체가 드러나고 루이지애나식민지는 이주민들을 모우기 조차
어려울 정도가 되면서
인도회사의 주식이 폭락을 시작하자
오를레앙공과 존 로는 인도회사와 왕립은행을 합병하는등 호재를 만들려 하나
인도회사의 폭락은 막지를 못했다.(액면가의 8%까지 폭락)
통화지폐는 26억 리브르에 달했지만 주화는 그의 50%도 미치지 못하고
그 중 상당부분이 왕립은행이 아닌 국민 개인의 침대밑으로 숨은 상태여서
왕립은행은 일람불을 하지 못할 입장 이었다.
드디어 지폐의 평가절하를 5월21일에 취하나 폭동이 일어나서 7일만에 취소를 하고
대신 지폐의 주화 교환을 정지 한다.
존 로는 드디어 이 모든 것의 책임을 떠안아서 민중의 증오의 대상이 되고
드디어 집에도 있지 못할 정도의 위협을 당하여 오를레앙 공이 거처하는 왕궁에서
그의 가족과 생활을 한다.
6월10일 다시 주화교환을 실시하지만 금/은의 주화가 아닌 구리주화로 교환이 되고
민중은 구리주화라도 보유하려고 엄청난 무리가 왕립은행으로 몰려들고
그 과정에서 깔려죽고 총에 맞아서 댓명이 죽는다.
오를레앙 공은 인도회사의 주가를 살리려고
인도회사에 국외 해상교역독점권을 주려하나
이로 인해 파산할 수 있는 수천명 서민의 진정으로 프랑스 법원은 법령인준을 거부하고
오를레앙공은 분노하여 법관전원을 시골로 유배보낸다.
이러면서 인도 회사가치는 계속하락 하는데,
하락이 시작되기 6개월 전에
존 로는 한국에서 21 세기가 되어서 대중들에게 보편된 '주식 콜 옵션'을 팔았다.
그 방법은 주가의 정점무렵에서 (1주 발행가격 500리브르->정점가격 18,000리브르) 투자자들에게
1000리브르의 예탁금을 내고 6개월후에 행사가격 1만리브르로 주식을 살수있도록
주식 콜 옵션을 팔았다
하지만 주식이 액면가의 8%(500리비르->18,000리비르->40리브르) 까지 하락한 판에
청약대금은 모두 납부해야 할 경우 엄청난 손실을 보아야 하는 많은 선물 옵션 주식 청약자들은
청약 잔 대금에 대한 압류를 두려워하여 모든 재산을 가지고 해외로 도피를 했고,
오를레앙공은 해외도피자에게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언도 한다.
모든 금융붕괴 책임을 존 로가 뒤집어 쓰는 상황이 되었고
그는 결국 외국으로 나갈 것을 오를레앙공에게 청하고
오를레앙 공은 출국을 허용하면서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돈을 가져가라 "한다.
하지만 49세의 존 로는 다이야몬드 하나만을 갖고 가족과도 이별을 한체 홀로 베니스로 떠난다.
그 곳에서 언젠가 오를레앙 공이 자신을 프랑스 신용회복을 위한 재정전문가로 다시 불러주기를 기대하면서
유일한 재산인 다이야를몬드를 저당잡혀가면서 도박으로 생활을 꾸려가지만
1723년 오를레앙 공이 사망하자 프랑스 왕조가 자신을 부를 것이라는 희망을 접어야 했고
프랑스를 떠난 이후 다시는 아름다운 아내와 이쁜 딸을 보지 못한 체
고향 스코틀랜드 에든버른, 그리고 자신의 영화가 묻혀있는 프랑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태리의 어느 결핵 요양소에서 1729년 58세의 나이로 지난 날의 영화만을 기억한 체
가난속에 쓸쓸히 죽는다.(존 로는 그 후 캉티용과는 달리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리지 않았음이 밝혀졌고
도리어 미시시피 식민지 토지 매입으로 손해를 본적도 있는게 밝혀 졌으며
그의 가문은 현재 프랑스에서 Lauriston 후작의 지위로 이어지고 있다.
또 한 그가 만든 종이화폐제도는 21세기 현재 전 세계 국가가 화폐의 가장 중요한 형태로 쓰고 있다))
이 같은 과정에서 루이 14세에게 20억 리브르를 빌려준 40 여명의 채권자는 채권 대부분을 정리했고
루이 15세는 루이왕가의 천문학적인 부채 많은부분을 갚았고 그 후 70년 가까이 루이왕조를 연명을 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많은 귀족과 중산층이 손해를 보고 파산한 경우도 있었고
그 들의 루이왕가에 대한 분노와 응어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까지 간다.
존 로는 그의 부친이 물려준 재산마저 찾지 못한 상태에서 이국에서 가난하게 죽었지만
그의 아내와 딸은 프랑스에서 존 로가 마련한 돈으로 부유하게 살았고,
오를레앙 공은 업무스트레스로 49세의 나이에 사망을 했으며(1674년-1723년)
그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척한 존 로의 친구 캉티옹은
영국에 가서 역시 남해회사라는 투기판에 들어가서 다시 엄청난 부를 축척을 했지만
30대 중반의 젊은 미혼의 나이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화재가 나서 타죽는다
(그는 영국 남해회사의 투기로 인해 파산한 영국 신사들의 계획적인 방화로 인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백과사전에 나타난 존 로
존 로(John Law, 1671년 4월 21일 ~ 1729년 3월 21일)는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이다.
그는 돈은 교환의 수단일 뿐이며, 스스로 부를 창출해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데 있어 무역을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였다.
한때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기꾼으로 묘사되곤 했다.
결투와 도박으로 젊은 나날을 보낸 로는 경제계에 발을 들인 이후
미시시피 버블(Mississipi Bubble)과 뒤이은 프랑스의 경제 대붕괴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1960년대 초부터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현재 그는 아담 스미스 이전의 경제학자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존 로
2.백과사전에 나타난 캉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