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스크랩] 바람 / 김남조

장자와노자 2011. 5. 2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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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 김남조

 

바람 부네
바람 가는 데 세상 끝까지
바람 따라
나도 갈래

 

햇빛이야
청과 연한 과육에
수태(受胎)를 시키지만
바람은 과원(果園) 변두리나 슬슬 돌며
외로운 휘파람이나마
될지말지 하는 걸

 

이 세상
담길 곳 없는 이는
전생에 바람이던 게야
바람이 의관(衣冠)을 쓰고
나들이 온 게지

 

바람이 좋아
바람끼리 훠이훠이 가는 게 좋아
헤어져도 먼저 가 기다리는 게
제일 좋아

 

바람 불며
바람따라 나도 갈래
바람가는 데 멀리멀리 가서
바람의 색시나 될래

 

 

 

목숨 / 김남조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 살다 보면 목숨이 허망하게 여겨질 때가 허다하다.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에서 부대끼는 생명은 연약하기 짝이 없으며, 이 유한성 앞에서 인간은 무력감에 빠지고 절망한다. 그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애타게 부르짖는 간구(懇求)는 목숨 그 자체이다. 가치로운 삶, 행복된 삶은 결국 목숨이란 근원적 조건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의 유한함 앞에 신을 향한 기원은 절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에서의 위기 상황은 이 시가 나온 시기를 상기할 때 아마도 6·25 전쟁이란 비극적 상황을 말하는 듯하다.

 

1연 :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태로움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진정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목숨이 부대끼는 존재들은 모두 이런 위기에 빠져 있다. 이것이 피조물(被造物)들의 유한성이다. 1연의 상황을 6·25와 관련지어 보면, 살기 위해 길을 떠나는 피난 행렬의 처참함과 관계된다. 불쌍한 사람들이 줄줄이 떠나는 신작로에 가축들도, 세간들도 모두 산을 배경으로 쓸쓸히 피난의 길을 떠난다.

 

2연 : 그 행렬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해 간다. 가을 바람에 가랑잎이 날리듯 그들의 목숨은 처연하다. 그들은 모두 살고 싶은 욕망에 찬 불쌍한 인생이다. 전화(戰火)에 다는 서울에서, 연꽃이 오므려지듯이 금방 죽어 갈 듯한 이 땅을 붙잡고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 이 상황에서 기원하는 것은 오직 목숨이다. 가치로운 삶도 이 기본적 조건인 생명의 부지에서 가능해진다. 생명은 생명 자체로 중요하다. 생명의 존엄성, 그것을 넘은 외경(畏敬)의 차원에까지 승화된 인식이다. 따라서 그가 드리는 기도는 단순히 생물적 존속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속에는 생명 존중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3연 : 비록 천벌(天罰)일지언정 목숨만은 부지되기를 소망한다. 첫 행에 보이는 역사적 상황은 이 시가 6·25를 배경으로 한 것임을 암시한다. 고단한 삶에 허우적거리다 끝내는 헛되어 죽어간 자들이 하늘로부터 치죄(治罪)당할 족속이더라도 죽음만은 면하기를 바란다.

 

4연 : 비록 돌멩이처럼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처참한 삶이더라도 목숨만은 잃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망을 기도한다. 이 기도는 자신에 대한 기도이면서 뭇 생명에 대한 기도이기도 하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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