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진달래 캐러 왔다가 / 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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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캐러 산에 왔다가
진달래꽃 흐드러진 산자락
삽자루에 기대어 넋놓고
꽃구경만 한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래도 꽃들이 심상치 않다
화장끼도 화냥끼도 없이
그냥 바람난
바람난 게 무언 줄도 모르고
그냥 바람난
아슬아슬한 여자애들만 같다
하염없이 바라본다면
그 곁에 다가와 비로소
맘놓고 곱게 필 진달래꽃
돌아보지도 말고 그냥 돌아갈거나
그냥 돌아가고픈 속을
환히 알고 있는지
어디 한번 일 저질러보라고
깔깔거리는 산자락마다
흐드러지는 진달래꽃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
퇴근 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번이 아니다
오늘도 미심쩍은 계단을
그냥 내려왔다는 누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깜박 잊고
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
그런 축에 낄 위인도 못된다
아마 잘 닫고 잘 잠갔을 것이다
혼자 남은 주막에서
술값을 치루다가 다시 미심쩍다
창문을 닫은 기억이 없다
출입문 잠근 기억이 전혀 없다
전기 코드도 꽂아둔 채로
그냥 나온 것만 같다
다들 가고 없지만 누구와도
헤어진 기억이 없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 일이냐
매일같이 닫고 잠그고 뽑는 것이
보통 일이냐, 그래, 보통 일이다
헤어진 기억도 없이
보고싶은 사람 오래오래
못 만나는 것도 보통 일이다
망할 것들이 여간해서 안 망하는 것쯤은
못된 짓 못된 짓 끝도 없는 것쯤은
열어놓고 꽂아놓고 사는 것쯤은
얼마든지 보통 일이다
닫고잠그고가고보고싶고
다 보통 일이다 술기운만 믿고
그냥 집으로 간다 집에서도 다시
닫고잠그고뽑고열고마시고끄고그리고
깜박깜박 그대 보고 싶다
누가 써놓고 간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 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것 같다
정순아 보고자퍼서 죽겠다 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겨온다
둘러보아도 아무도없는 가을바다
저만치서 무심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