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스크랩] 세계화의 역사와 패권 경쟁(1)

장자와노자 2009. 6. 23. 21:16

이렇듯 18세기 영국에 대한 패배는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을 모색케 하는 일종의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 영국의 체제는 일종의 모델 혹은 극복 대상으로서 지나칠 수 없는 준거점이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애국주의는 비록 앙시엥 레짐 하에서 태동하였지만 그 안에 계몽주의자들의 진보의 신념, 혹은 영국적 요소를 채택하고 나아가 평등적 인민주의를 가미함으로써 가히 '프랑스적 정체성'이라고 칭할 만한 새로운 종합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민적 애국주의의 강령은 이론 차원에 머물지 않고 앙시엥 레짐 말기부터 바로 국내 개혁으로 실천되어 프랑스 전통 사회의 기반을 뒤흔들고 새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서론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세계화를 미국이 기획하고 추진하는 프로젝트로 보는 해석인데, 그 전형적인 저술로는 피터 고완의 『세계 없는 세계화』를 들 수 있다. 여기서 고완은 기술이 아니라 정치의 측면에서 세계화에 접근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1970년대 초에 화폐와 금융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1960년대부터 누적된 무역적자 때문에 달러의 가치를 밑받침할 수 있을 만큼 금을 보유하지 못하게 되자, 우선 달러에 대한 금 태환을 중단하고 달러와 각국 통화 사이의 환율을 고정시키던 관행도 폐기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무역의 자유화와 활성화를 위해 구축되었던 브레튼우즈 체제가 와해되고 국제 경제질서도 위기에 부딪혔다.

 

그러나 미국은 유가 인상을 유도하고 산유국들이 벌어들인 오일달러를 유치함으로써 달러를 안정시키는 한편,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민간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해외에 달러를 빌려주고 신용을 관리하게 유도했다. 이렇게 해서 수립된 달러 - 월스트리트 체제(Dollar-Wall Street Regime)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핵심적인 기능을 맡게 되었다.

 

레이건 행정부 이래 권력을 장악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전략에 따라, 미국은 이 새로운 체제를 이용해 세계의 금융을 통제함으로써 시장경제를 전파하고 자유무역을 확립하려 했다. 따라서 고완이 보기에 세계화는 금융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실행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서 미국은 전능한 존재처럼 묘사되는 반면에 다른 나라들은 무력증에 빠진 환자처럼 취급되었다.


우리들의 연구 결과를 하나의 전체로 묶어보면, 지금까지 세계화 논쟁에서 간과되었던 두 가지 측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 가지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안보가 패권 국가들이 세계화에 관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 17세기에 세계화를 주도한 네덜란드에서 나타난다. 그 시기의 네덜란드를 다루는 주경철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아시아로 팽창하는 데 성공한 것은 넓은 교역 체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던 우월한 군사력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우세한 무력을 이용해 아시아의 저항뿐 아니라 영국의 침투도 봉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안보정책의 의미는 18세기 영국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영석은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영국이 프랑스와 군사적 대립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재정 확충과 군비 증강을 동시에 추진하는 정책을 통해 프랑스를 누르고 해외에서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했다고 지적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의 영국을 다루는 조용욱의 논문에서 국가안보의 중요성은 가장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에 따르면, 영국은 이 기간에 독일의 도전에 대비하는 등 패권을 유지하면서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기술혁신을 통해 신형 전함을 개발하고 전략 폭격 같은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면서 군사력을 증강함으로써 힘의 우위를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정책 노선은 오늘날의 미국에서도 볼 수 있다. 백창재는 오늘날의 세계화를 국제체계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대해 다른 강대국들이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협조하면서 세계화에 편승한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그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이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강대국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미국이 막강한 경제력과 더불어 첨단 정보와 기술을 바탕으로 군사 분야의 혁명을 선도하는 안보정책을 견지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VOC의 설립

오랫동안 유럽 내 후추 도매 상업에 참여하는 데에 만족하고 있던 네덜란드가 1590년대에 직접 아시아 항해를 기획하게 된 것은 결국 이 사업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1580년대 중반부터 푸거(Fugger)가를 비롯한 대상인 집단이 콘소시엄을 구성하여 유럽 내의 후추 재분배 사업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면서 네덜란드 상인들은 점차 이 사업에서 배제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유럽에서는 후추 수요가 커지는 데 비해 포르투갈의 아시아 교역의 효율성이 떨어져서 상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후추 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었다. 상업 기회는 더욱 커지는데 오히려 그 기회로부터 배제되어 가는 상황에서 네덜란드는 아시아 항해를 독자적으로 개척하고자 했던 것이다.


국가가 공인한 독점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회사가 국가의 기능을 상당 정도 인수받아야 했다. 제35조는 VOC가 전국의회를 대신하여 아시아의 국가 및 영주들과 조약 체결, 전쟁선포, 요새와 상관 건설, 군인 충원 등 국가가 할 수 있는 여러 기능을 대신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이렇게 볼 때 VOC는 "국가 밖의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흔히 자본과 국가가 효율적으로 결합한 사례로 소개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군사력의 사용에 관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군사력은 아시아의 지방 세력들 및 유럽의 경쟁 세력들과 동시에 싸워야 하는 이 회사로서는 핵심적인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회사가 충원한 군인의 수는 17세기 초에 3,000명 정도였으나 1750년경에는 17,000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VOC는 국가로부터 무력 동원을 비롯한 상당한 정도의 공권력을 부여받았으나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은 이사들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다음으로 이 회사의 자본 모집에 대해 살펴보자. 1601년의 시점에서 보면 선구회사들은 다음 해에 출항할 배에 필요한 자금을 적립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1602년에 동인도회사의 성립이 결정되자 이들은 이미 준비된 자금을 VOC에 투자해서 많은 배들을 하나의 선단으로 구성하여 아시아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 선단은 성공리에 귀환하여 265%의 투자 이익을 냈다.

 

이 항해까지는 전적으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투자자들은 1회의 출항을 위해서 자금을 출연한 것이고 배가 귀환하면 정산 과정을 거쳐 이익이나 손해를 분담하고 나서 원칙적으로 이 모임은 해산도니다. 그런데 1602년의 항해 이후 여기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투자자들은 이 회사에 투자한 금액을 곧바로 찾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신 투자자가 자신의 투자금을 회수하고 싶으면 주식 시장(Beurse)에 가서 자신의 주식을 팔면 된다. 따라서 회사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자본이 보존되므로 투자자들에 관계없이 회사가 해체되지 않고 항구적으로 존립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사가 아닌 일반 주주들은 회사 경영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당시에 대단히 낯선 제도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무기한'의 투자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대신 10년 동안 '장기간' 투자한다는 타협적인 방식을 취했다. 구체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선구회사와 같은 방식으로 이미 자본을 모아 항해한 것에 대해서는 이전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결산하되 그 후 새로 출항하는 배부터는 10년 이후에 정산을 한다. 즉, 1612년과 1622년에 각각 그 이전 10년의 활동에 대해 정산을 하는 것이다.

 

 특허장의 유효 기간이 21년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주들로서는 10년을 기다린 다음에 배당을 받는 것은 아니며, 회사가 5%의 이익을 낼 때마다 곧바로 배당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바로 이 점은 다시 이전의 선구회사 방식을 차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VOC의 제도에는 새로운 방식과 이전 방식이 혼재해 있었다.



VOC의 아시아 교역

사실 아시아는 아메리카와는 사정이 달랐다. 예컨대 무굴 제국은 피사로 앞에 쉽게 무릎을 꿇은 잉카 제국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시아 제국들이 대단히 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VOC가 그런 제국에 직접 도전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므로, 뚫고 들어가기 쉬운 '약한 고리'들을 차지하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었다. VOC로 보면 다행스럽게도 인도네시아 제도는 군사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VOC는 1605년에 암보이나를 점령한 것을 필두로 17세기 내내 점차 여러 지점들을 차지해 나갔다.

이처럼 VOC는 아시아 내에서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보충적인 이익(수송비와 보호 비용)을 누리는 정도에 머물렀다. 예를 들어 구자라트 - 페르시아 간의 교역을 보면, 네덜란드인들의 시장 지배율이 제한적이었고 이윤도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이윤율은 1640년처럼 40%에 이르는 때도 없지 않으나 1651년의 4%, 1659년의 7~8%처럼 대체로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시장의 상업적인 요소 외에도 정치 사회적인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우선 활동적인 아시아 상인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소박한 수준에 머물렀던 구자라트 상인들이 인도-중동 간 국제무역에서 VOC와 경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현지 시장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훨씬 적은 비용으로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또 그들 자신이 소소한 이윤을 얻고도 만족하며 일을 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무굴 제국 황제의 개입이다. '무굴 제국의 돈주머니'인 중동으로부터 들어오는 귀금속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황제는 구자라트 상인들에게 계속해서 서쪽으로 직물을 수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샤 자한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는 귀금속을 더욱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 황실이 직접 운영하는 상선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황제의 선박들"에 상품이 충분히 적재되지 않으면 무굴제국 소속이 아닌 배에는 상품을 싣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항해법은 유럽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귀금속의 유통

근대 초 세계화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중의 하나가 세계적인 귀금속 및 화폐 유통이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큰 흐름은 은의 세계적 유통이다. 이를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아메리카의 대량 생산, 유럽의 중개, 아시아 특히 중국으로의 수입이라 할 수 잇다.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예컨대 최종수요자(enc customer)인 중국의 거대한 수요에 주목하면서, 중국의 '은화(silverization)'가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리고 과연 중국의 경제 발전에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진행 중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VOC 역시 이런 큰 흐름에 동참하고 있었다. VOC가 아시아에서 상업망을 형성하고 또 확대해 나가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귀금속의 유통 측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사업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유동성(liquidity)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는 바, 네덜란드는 편협한 중금주의(bullionism)의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귀금속을 아시아로 송출했다. 조사이어 차일드 경이 지적한 것처럼 상당한 양의 은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져가서 "펌프를 작동시킨 것"이 네덜란드의 상업 성공의 한 요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네덜란드 역시 중금주의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으며, 자국의 귀금속을 무한정 국외유출시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로서는 아시아 내에서 귀금속을 조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초기 세계화와 VOC의 의미

아시아에서 성공적으로 상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요인은 VOC의 형성 과정에서 자본과 국가가 성공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브로델의 거대 담론 체계를 빌어 설명한다면 서구 자본주의의 성공은 곧 자본과 국가가 상호 "긍정적인(positive)" 관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며 - 이에 비해 중국은 국가, 즉 황제체제가 자본의 발달을 억압했거나 대체한 경우라고 보고 있다 -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가 가장 현저한 경우라 할 수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에는 자본이 대단히 풍부했다.

 

 VOC는 이런 자본을 새로운 기업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데에 성공한 사례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예전의 모험조합 방식이 아니라 근대적 주식회사 방식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전국의 소액 투자가들이 이 회사에 투자했고, 이것을 대자본가 - 기업가 계층이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는 이러한 자본의 조직화 및 기능을 돕고 그에 필요한 정비 작업을 한 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국가가 자본에 대해 군사와 행정 등의 면에서 도움을 준 데에 머물렀을 뿐, 직접 사업을 관장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조직된 VOC는 아시아에서 대단히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무역 체제는 국가(왕실)의 지나친 개입의 결과 장기적으로 활력을 상실해갔다. 즉,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는 "국가의 연장"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에 비해 VOC는 분명 국가가 후원하는 "독자적인 상업 회사"였다.


VOC의 형성을 유럽의 장기적인 경제 발전 동향과 관련지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VOC의 형성 움직임이 활기차게 이루어졌던 1590년대가 유럽 전반의 불황기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16세기 내내 장기적인 호황이 지속된 끝에 팽창이 고비를 맞이한 때이다. 그것은 농업 불황과 그에 따른 상업 및 공업의 2차적인 불황이 이어지는 전통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아직 채 성숙하지 못한 서유럽 근대 자본주의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16세기 경제 성장의 중심축의 하나였던 네덜란드로서는 나머지 유럽 전역의 불황 때문에 투자 기회를 갖지 못하고 큰 타격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네덜란다는 이 시기에 오히려 과감하게 팽창을 시도했다. 1590년대에 네덜란드의 상업이 지중해 지역으로까지 팽창해 간 것은 흔히 지적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은 -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더 큰 - 중요성을 가진 것이 아시아로의 팽창이었다. VOC는 유럽 경제가 한 단계 더 큰 차원에 확대 팽창하는 한 중요한 계기였던 것이다.



상인과 식민

런던이 17세기 후반 이래 암스테르담을 제치고 해외무역의 중심지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크롬웰 공화정시대에 연이어 제정된 항해법에 크게 힘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1651년의 항해법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영제국과 그 식민지로 상품을 운송할 경우 영국 국적의 선박이나 또는 선원의 다수가 영국인인 경우만을 허용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무역에서 네덜란드 해운업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법이 과연 영국 해외무역 활성화의 동력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다.


재정-군사국가와 전쟁

중요한 것은 영토와 인구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영국이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사실 한 세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18세기 영국 국가의 성격 및 변화에 관해서는 근대화론의 시각에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18세기 영국의 국가체제는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귀족과 젠트리의 기득권을 보장할 정도의 작고 아마추어적이며 부패한 체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의 성격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의 일이었다. 즉 산업화와 더불어 사회문제를 비롯한 여러 난제들이 누적되면서 국가의 성격에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정부의 역할이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증대되기 시작했고, 통치제도가 전문성을 띤 기제로 바뀌었다. 수상직, 각의, 하원 조사위원회, 왕립위원회와 같은 제도적 관행을 비롯해 좀 더 전문적이고 효율적인 관료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변화를 선도한 세력은 종래의 귀족과 젠트리가 아니라 탁월한 재능과 교양을 지닌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이와 같은 근대화 모델은 우선 작은 정부가 2차 백년전쟁에서 수차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행정에서 효율성과 전문성을 강조하는 추세가 정부의 역할 증대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증대에 대한 반발이자 축소 노력이었다는 점을 간과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세기 국가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존 브루어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은 간헐적으로 발발하는 전쟁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기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사실 전쟁은 원래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해외시장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일환으로 벌어졌기 때문에 주도니 전장은 아메리카나 인도와 같은 해외 식민지였다.

 

영국은 점차 강력한 해군과 육군을 유지할 필요가 이성서기 때문에 재정 지출을 늘렸고, 이를 부담하려고 물품세 부과와 일련의 국채발행이라는 수단에 의존했다. 이 시기의 국가는 일종의 효율적인 전쟁기구였다. 따럿 그 성격은 한마디로 '재정-군사국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정-군사국가가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걸쳐서 전개된 이른바 금융혁명의 토대 위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잉글랜드 은행 창설 등을 주된 내용을 하는 금융혁명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해외무엿에서 축적된 자본을 정부의 보호 아래 투자할 수 잇는 공적 신용구조를 조성했다는 점이다. 금융혁명은 장기부채의 진화과정에서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다. 장기채무의 경우 부채 전액의 상환은 반영구적으로 미룰 수 있는 반면, 단기채무는 1년 단위로 상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자율이 높았다.

 

단기채무를 장기채무로 전환하면 할수록 국가는 금융엘리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금융혁명이 진행되면서 화폐자본을 축적한 사람들은 정부에 빌려준 돈을 잉글랜드은행이나 사우스 시 회사(South Sea Company) 또는 왕립아프리카 회사가 발행한 채권(bond)으로 전환할 수 잇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재정에 필요한 자금을 장기부채 형태로 차입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일련의 식민지 전쟁에서 영국이 우위를 확보한 것도 이러한 재정운용에 힘입은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 금융부문에서 이루어진 광범한 혁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즉 1697년 화폐 재주조와 사실상의 금본위제도, 구 런던시의 전문적인 상인은행 발전, 담보융자시장의 성장, 환어음 이용 증가, 주식 거래, 해상 및 화재보험의 발전 등이 이 혁신의 주된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금융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 즉 국가 재정을 보증할 수 잇는 중앙집중적인 조직 및 통제, 정기적이고 효율적인 과세제도, 공공차입에 동원할 수 있는 자본 축적 등이 필요하다. 영국은 재무부의 역할 증대, 물품세(excise)의 도입, 잉글랜드 은행의 창설 등으로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영국의 물품세 시행은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비교적 소수의 생산자나 상인에게 부과하기 때문에 세금을 쉽게 거둘 뿐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7년 전쟁의 경과는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전쟁의 전 기간에 걸쳐 영국은 그 해군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영국은 북미의 루이지애너, 서인도제도의 설탕산지 등을 식민지로 편입했고 인도 지배권을 더욱더 강화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물품세와 국채에 바탕을 둔 재정-군사국가의 행정구조에도 변화가 나타났을까? 왕권을 약화, 상시적인 전쟁, 조직의 확대 등을 고려하면 이전과는 좀 더 다른 통치의 관행이 정립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18세기에 중앙정부조직에 변화가 일었다. 정부의 지배력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음에도, 권력의 중심은 분산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 시대의 영국 정치는 중앙의 각 부처가 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맡고, 이를 위해 의회의 동의와 협조를 얻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이르면 이전보다 더욱더 비대해진 재정-군사국가는 더 이상 탄력적으로 운영되기 어려웠다. 전쟁기구로서의 영국 정부는 엄청나게 값비싸고 낭비적이라는 확신이 널리 퍼졌다. 당시에 지배층이 보상하거나 영입할 만한 인사들에게 부조금, 명예 직책, 공짜 수당 등을 부여해 끌어들이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지주세력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8세기에 그들은 단일한 지배구조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것은 금융혁명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부상하는 집단, 즉 '금전적 이해관계'(moneyed interest)를 가진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서만 지탱할 수 있는 체제였다. 급진파 인사들의 비판에 따르면, 전쟁기의 조세부담과 막대한 국가채무는 기실 불평등한 사회적 정치적 특권을 영속화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식민지 경영 - 인도의 사례

영국 동인도 회사가 무역을 통한 양도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들의 느슨한 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는 편견이 널리 퍼진 것은 다른 나라 회사들에 비해 토착사회와 비교적 순탄하게 결합할 수잇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18세기 초부터 동인도회사가 이른바 재정-군사국가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영국정부와 동인도회사는 일종의 공생관계였다.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에 대한 지원의 대가로 주식을 배정받아 그 주가 상승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잇었다. 이에 비해 동인도회사는 왕실의 군사적 원조를 이끌어내어 유럽 경쟁국 및 인도 토착세력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최고, 최대의 해군력 - 1880년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영국은 19세기 산업화를 선도했으나 '군사기술과 전쟁의 산업화'에서는 1880년대 초까지 그러지 못했다. 흔히 지적되듯이, 크림전쟁(1854~1856)은 참전국 모두의 행정적, 군사적 취약점과 한계를 잘 드러내줌으로써 무기, 군제, 전략의 혁신과 발전을 촉발시켰는데 이러한 경향에서 영국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이러한 영국을 크게 긴장시킨 것은 다른 국가들, 특히 독일이 해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해군을 증강시키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해군은 근대 초 이래 영국 국가안보의 핵심이었다.

궁극적으로 여론의 싸움에서 승리한 측은 첨단기술을 갖춘 해군을 선호하는 사람들이었고, 20세기 초 독일을 비롯해 모든 주요 국가들이 추구하던 대규모 육권의 양성은 영국의 군사 전략에서는 뚜렷한 입지를 구축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영국은 독일과의 장차 싸움에서 해상봉쇄를 통해 독일경제를 붕괴시킨다는 전략을 채택하면서 영국 해군이 해상로를 확보함으로써 육상전을 치르는 동맹국들에게 필요한 군수물자를 제공한다는 전쟁계획을 수립했다.


영국 공군의 대두와 발전 -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

1918년 말 영국은 유일하게 독자적인 공군과 공군부를 가진 국가가 됐고 이 특징은 192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이보다 더 특기할 점은 영국공군의 주된 임무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략적 폭격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시기에 영국공군은 육군과 해군으로부터 거센 해체의 폭풍을 견뎌내야 했다. 육군과 해군이 공군의 해체를 요구한 것은 공군력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저마다의 강력한 비행군단을 거느리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공군은 해체의 요구에 대해 공군이 갖는 고유한 전략적 기능을 강조하며 맞섰는데, 1920년대 초 마침 불거진 중동지역의 통제에 관한 문제가 공군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게 됐다.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는 광활한 아프리카와는 달리, 중동은 이도를 기초로 한 영제국의 구도에서 긴요한 지정학적 축을 형성했고, 중동에서의 핵심은 이라크와 그 주변의 유전지대였다. 공군력의 사용은 이 지역처럼 인구가 조밀하지 않은 곳에서 비교적 값싸고 쉬운 통제방식일 수 잇다는 점이 지적됐고, 제국 방어와 통제의 효율성과 경제성을 앞세운 처칠의 주장을 따라, 중동의 지상군은 폭격 편대로 교체됐다.



근대 국제체계의 변화

근대 국제체계를 구성하는 국가들은 주권국가들이다. 주권(sovereignty)은 주어진 영토 내의 주어진 인구에 대한 독점적, 배타적인 통제력이며, 국가의 주권은 국가들 간에 상호 인정된다. 따라서 국가는 일정한 영토 내에 거주하는 인구들의 정체성(identity)과 충성심(loyalty)을 조직하는 가장 효율적인 조직이며, 이들의 욕구를 대외적으로 조직화하여 표출한다.

 

국제정치는 국가들 간의 이러한 전략적 행위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주권국가들은 생존이 최고의 목표이며, 이 점이 국제체계를 구성하는 단위로서의 근본적 속성이다. 생존이 최고의 목표가 아닌 국가는 도태될 수 밖에 없고, 국제체계를 구성하는 단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국제체계에서 국가들이 배열되는 근본 원리는 무정부(anarchy)이다. 국내정치체계와 달리 국제정치체계에는 중앙의 권위가 없으며 주권국가들이 위계적으로 배열되지 않는다. 따라서 공동의 규범이나 규칙을 강제하고 국가들의 생존을 보장해줄 어떠한 권위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국제사회란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간 체계(inter-state)만이 있을 뿐이다. 이 체계는 생존을 위해 주권국가들이 자구(selp-help)할 수밖에 없는 체계인 것이다.


추동력 - 힘의 정치의 변화

요컨대 힘의 정치는 미국 중심의 안정적 단극질서와 이에 대한 강대국들의 편승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힘으 정치는 다음과 같이 국제체계의 서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우선, 근대 국가의 핵심적 기능이자 국가이익인 안보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역사적 특수성과 지역 패권 경쟁의 가능성이 높은 동아시아 지역을 제외하면, 특히 서구 강대국들 간에는 폭력의 사용을 통한 국가간 분쟁 해결이 선택의 범주에서 제외될 수 있다. 이 경우 국가는 가장 핵심적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고, 다른 영역에서의 국가 주권의 약화도 가속화될 수 있다.


반면에 미국의 국가성은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압도적 힘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힘의 행사를 통해 미국은 보다 안보국가화/군사국가화 될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다른 강대국들이 편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극질서의 안정을 위협하는 문제들을 홀로 해결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힘의 우위를 보다 강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한 패권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탈냉전 이후 국제질서의 안정을 위협하는 근원이 테러집단 및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으로 지목되고 있고 현재의 미국 군사력만으로 이 위협들의 원천적 봉쇄가 쉽지 않다는 점이 인식되면서, 미국의 군사력의 강화와 국가성의 강화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한편으로는 미국 내부의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문제를 유발하여 미국 국력의 효과적인 투사가 어렵게 되거나, 다른 한편으로 국제적인 힘의 정치의 부활을 자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추동력 - 사회 조직의 변화

지구적 문제의 대두와 기존 국가간 제도의 문제점들을 감안할 때 글로벌 거버넌스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으며, 이미 이러한 사회조직의 진화는 여러 영역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전개되고 있다. 예컨대 환경이나 인권 등, 개별국가 수준을 넘어선 대응이 필요하고 기존의 국가간 제도에 의한 해결이 요원한 영역에서는 비국가기구들과 이들의 네트워크가 중요한 행위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힘이나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 보다 협력적이고 합의적인 의사결정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구적 문제가 대두되었다고 해서, 그리고 기존의 국가간 제도가 기존의 문제점들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해서, 글로벌 거버넌스가 필연적일 수는 없다. 글로벌 거버넌스로의 이행은 기존 국가간 제도와 개별국가들, 그리고 개별국가들 내부의 변화와 동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글로벌 거버넌스가 요원해 보이는 또다른 핵심적인 이유는 기존 국가간 제도의 핵심적 행위자인 미국이 여전히 근대국가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데있다.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omprehensive Test Ban Treaty: CTBT)과 같은 안보 영역에서부터 교토기후협약(Kyoto Protocol)과 같은 환경 영역과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C)와 같은 인권 영역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글로벌 거버넌스의 구축보다는 자국의 국가이익에 따라 행동해왔다.

 

이러한 행태가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체계에서의 미국의 지위와 미국의 정치문화적, 제도적 기반에 따른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것일 수 있다. 패권적 존재가 제외된 글로벌 거버넌스는 실현성이 없다.



18세기 프랑스의 대외무역 - 대외무역의 도약

프랑스의 식민제국이 붕괴되었음에도 식민지 무역이 도약한 것은 새로운 식민지의 편입보다는 가까스로 보존한 기존 식민지 경제가 팽창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서인도 제도로부터 설탕, 커피, 원면, 염료 등을 주로 수입한 반면 밀, 직물, 포도주, 그리고 노예 등을 수출하였는데 식민지 산물들, 특히 설탕과 커피는 프랑스를 미롯한 유럽 시장에서 거의 무제한적인 수요를 기대할 수 있었다.

실로 프랑스의 식민지 무역은 상당 부분 창고무역 형태를 취함으로써 국내 산업생산을 촉발하는 효과가 크지 않았다. 프랑스의 상인들이 서인도 제도에서 수입한 설탕의 3분의 2와 커피의 3분의 1은 주로 화란, 독일 그리고 근동 지방의 국가들로 재수출되었으며 수출 무역 전체로 보더라도 그 비중은 1770~1780년대에 약 3분의 1을 점하였다.

 

 또한 상인들은 식민지가 필요로 하는 공산품 등을 화란이나 독일 등으로부터 수입하여 다시 식민지로 재수출하는 형태를 띠었다. 따라서 식민지 무역은 파리와 리옹 등 내륙 도시의 경제활동과는 거의 무관하게 전개되었으며 기껏해야 보르도, 낭트, 루앙 등 대서양 항구 도시 무역 상인들의 배를 불리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이러한 프랑스 무역과 경제 구조의 취약성은 1778년의 불 - 미 통상조약과 1786년의 영 - 불 통상조약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1778년 프랑스는 미국과의 상호 무역에 특혜를 부여하는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당시 미국과 전쟁 중이던 영국을 대신하여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전시에도 영국의 다미 수출은 프랑스의 수출액의 7배에 달하는 등 프랑스는 대미 수출에서 영국의 역할을 대신하지 못한 반면 프랑스 시장에 대한 미국의 수출은 급증하여 미국의 대 영국 수출을 앞지를 정도였다. 이렇듯 프랑스의 수출이 미약했던 이유로는 무엇보다 프랑스 제품의 품질이 영국의 그것에 뒤짐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지적된다.



18세기 프랑스의 식민지 전략

18세기에 들어와서도 프랑스는, 해상 무역의 도약에도 불구하고, 해군 전력의 증강을 기하지 못하엿다. 오히려 1708년 이래 해군은 재정적 긴축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나마 1758~1759년의 참패 이후 해군에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으며 해군 증강노력도 중단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프랑스 해군의 구조적, 전략적 어려움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국내에서 항상 육군과 우선순위를 다투어야 했을 뿐 아니라 해군 자체를 보더라도 지리적 위치상 대서양과 지중해에 전력이 분산되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식민지와 해상 무역의 패권이 주로 해상 전쟁으로 결정되는 구조에서 해군 전력의 증강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프랑스 식민제국의 영원한 고민이었다. 18세기 프랑스가 채택하게 될 식민지 정책은 이러한 고뇌의 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식민지 확장에 따른 정치 군사적 목표보다는 경제적 이익 혹은 대외무역의 보존을 우선시하겠다는 것이었다.

17세기 초 이래 프랑스 식민 제국의 주요 부분을 구성해온 북미는 경제보다는 정치, 군사면에서 중요성을 띤 지역이었다.루이 14세는 캐나다가 제국에 유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는데 그것은 내륙의 인디언들과 유대를 맺음으로서 영국 - 미국인들을 오대호 및 미시시피 분지로부터 몰아낸다고 하는 군사, 전략적 필요와 결부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디언들과 결합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적자투성이의 모피무역을 계속 유지하였던 것이다. 반면 1747년에 캐나다에 진출한 프랑스의 한 무역 상인이 자신의 친척에게 '솔직히 말하건대 이곳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쓴 것처럼 생산물의 가치에 있어서는 빈약한 곳이었다.


7년 전쟁의 패배를 인정한 파리 조약에서도 프랑스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식민지 영토를 영국에게 내주는 대신 무역권이나 조업권 등은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캐나다, 도미니카, 세네갈, 인도 등 식민지 전략의 핵심적인 요충지를 거의 모두 내주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뉴펀들랜드 앞 바다의 대어장에 대한 조업권을 사수하고 영국이 점령했던 열대산물의 보고인 구아들루프 섬과 마르티니크 섬을 반환 받음으로써 교역을 통한 경제적 토대를 지켜나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인도에서 프랑스는 내륙 영토를 내주는 대신 다섯 개의 상관을 남기게 되며 아프리카에서는 세네갈을 상실하는 대신 작은 섬 고레(Goree)를 보전하여 노예무역의 중개지로 삼았다.


1776~1783년의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영국은 해상 전투는 물론 북미 대륙 본토에서 대규모 대륙전쟁을 벌여야 했던 반면 프랑스는 최초로 대륙 부문을 제외시킨 채 해전과 식민지 전쟁에 힘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1783년에 베르사이유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는 영국의 세계 패권에 흠집을 냄으로써 복수심을 만족시켰을 따름이다.

 

 반면 영국은 아메리카를 상실했지만 오히려 미국에 대한 수출이 급증하였고 인도 시장도 실속이 있는 것이었다. 영국이 1763년까지 프랑스에 대해 해상,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면 1783년에는 상업, 재정적 승리까지 확보한 셈이다. 프랑스는 1783년 이후 국제무대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전쟁을 감당할 재정적 정치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어쨌든 영국에 대해 일단 복수를 했기 때문에 프랑스 대외정책의 기조는 평화공존으로 바뀌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식민지관

우선 피부색 혹은 출생지에 따른 인종적 차별을 거부하였던 계몽주의자들에게 식민지의 노예제는 집중적인 반대의 표적이 되었다. 몽테스키외는 노예제가 식민지의 소수 자유민에게만 이익을 안겨줄 뿐이라고 했으며 레이날 사제는 어떤 경제적 이익도 흑인 노예제의 끔찍함을 덮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흑인이 자유로워지면 더욱 열심히 노동함으로써 모국의 상품에 대해 더 많은 구매력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노예해방이 경제적으로도 유리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상업이나 무역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중농주의자들은 식민주 무역 혹은 무역 전반의 경제적 효용에 대해 불신을 나타내었다. 그들에게는 무역으로 인한 부의 창출은 토지 생산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특히 프랑스의 경우 영국과 달리 토지의 집약적인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내의 농업경작에 치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적' 식민지관은 흔히 군사적 영광과 위신 나아가 전략적 고려를 우선시 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절대왕정의 일반적 패턴을 벗어나는 것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인들에게 18세기 식민지 경쟁에서의 패배는 오히려 식민지의 가치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음 장에서 볼 것처럼 그것이 앙시엥 레짐 말기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영국과 다른 방향에서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자극한 사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유익한 패배'라고 볼 수 있는 면도 있을 것이다. 실로 앙시엥 레짐 말기 프랑스에서는 식민지의 효용을 프랑스 인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앙글로마니'에서 애국주의로

실로 프랑스의 여론은 영국에 대한 찬미 일색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18세기 후반에 프랑스 국가가 나아갈 길과 관련하여 프랑스 여론에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계몽철학자들의 입장이 영국의 관습과 풍습을 존경하고 그것을 모방하려는 입장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애국주의라 일컬어지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앙글로마니(anglomanie)에 대한 견제 역할을 했던 애국주의 혹은 조국이라는 개념은 독특하게 자유라는 개념과 결부되어 있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조국은 자유로운, 즉 행복한 인민이 사는 영역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애국주의는 모국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자유에 대한 애착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구소는 조국(patrie)을 정의할 때, 모국이 곧 조국이지만 조국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따라서 만약 제도가 그것을 가능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바꾸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혁명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18세기 영국에 대한 패배는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을 모색케 하는 일종의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 영국의 체제는 일종의 모델 혹은 극복 대상으로서 지나칠 수 없는 준거점이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애국주의는 비록 앙시엥 레짐 하에서 태동하였지만 그 안에 계몽주의자들의 진보의 신념, 혹은 영국적 요소를 채택하고 나아가 평등적 인민주의를 가미함으로써 가히 '프랑스적 정체성'이라고 칭할 만한 새로운 종합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민적 애국주의의 강령은 이론 차원에 머물지 않고 앙시엥 레짐 말기부터 바로 국내 개혁으로 실천되어 프랑스 전통 사회의 기반을 뒤흔들고 새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열었다.



루이 15세의 개혁

1760년대와 1770년대에 루이 15세가 행한 개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법제도 개혁이었다. 이는 단순히 재판과 관련된 기술적인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왕정의 근대화 및 개혁 노력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은 낡은 전통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고등법원의 법복귀족들이었다. 칙령에 대한 등기권을 무기로 고등법원은 18세기 내내 왕정의 경제적 근대화 및 조세 평등화 조치에 끊임없이 반대하였다.

 

루이 15세는 국내체제 개혁의 일환으로 1771년 2월 고등법원을 폐지하고 관직매매를 금지함으로써 법복귀족의 관직 세습을 철폐하였다. 아울러 재판을 무료로 하고 법관도 유급 관료화함으로써 시민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이러한 계몽 전제 군주적 시도는 방법상 독재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특권을 제한하고 보다 나은 사법제도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다.



루이 16세의 개혁

루이 16세 치하에서도 국내 개혁은 특권신분과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왕정은 18세기 후반에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하였고 비록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결국 토크빌이 말한 것처럼 '왕정이 몸소 프랑스 인민들에게 혁명을 교육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혁명과 제정기

1792년 공화국이 선포되고 그 성격을 정립하고자 하였을 때 프랑스인들은 구소가 주창한 반 상업적 논리를 신봉하였다. 구소는 상업적 교역이 인간에게 진정한 필요보다는 그릇된 필요를 심어줌으로써 인류를 타락시켰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그를 이어받아 총재정부의 내무장관이던 프랑수아 드 뇌샤토는 근대 상업은 끝없이 새로운 필요의 고리를 만들어 인간 사이의 이해관계의 타협 가능성을 위협하는 반면 농업은 필요의 사이클을 통제할 수 있는 성격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장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레구아르 사제는 영국과 구별되는 프랑스적 경로를 제시하였다. 영국은 오직 식민지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그 수단으로 삼으면 된다는 입장이지만 프랑스는 식민지 무역이 초래한 범죄를 인식하므로 그것을 변혁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 전략의 하나로는 국내에서 생산된 상품으로 식민지 산물들을 대신함으로써 노예제의 필요성을 없애는 것이고 본국에서 재배될 수 없는 산물들은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식민지에서 재배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 새로운 공화국 무역 동맹국들, 예컨대 미국 등을 파트너로 삼아 거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혁명기의 프랑스가 기존의 식민지와 노예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 속에서 프랑스의 공화주의적 전략

유럽 개별 국가들은 자신의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이러한 양면적인 전략을 구사하고 있으며, 프랑스 역시 이러한 양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가 1980년대 초반부터 가속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프랑스는 그 출발에서 역방향으로 진행을 시작했던 나라이다.

 

1980년에 출범한 사회당의 미테랑 대통령과 좌파정권은 사회주의적 조치를 강하게 추진하면서 여타의 다른 나라들과는 상이한 출발을 하였다. 또한 1995년에 출범한 우파 시라크 대통령에 의한 핵실험의 강행, 이라크전에 대한 시라크의 입장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특히 드골 이후, 프랑스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관계에서 지속적으로 대미 견제전략을 취해왔다. 정권의 좌우를 막론하고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노선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사라진 '제3의 길'?

프랑스의 2002년 총선이나 대선에서 나타난 특징은 뚜렷한 정치적, 경제적 쟁점이 정당의 색깔에 따라 드러났다기보다는 독특한 이슈들에 의해 선거의 결과가 급변하였다는 인상을 주었다. 대통령 선거 직전 파리 근교에서 발생한 테러는 이전 미국의 9/11을 연상시켰고, 치안의 문제가 주요한 이슈로 급부상하였다. 그 결과 극우파의 르펭이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이변을 낳았던 것이다.

 

물론 당연히 시락의 당선이 확정되었지만, 프랑스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 경향을 보여주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잇다. 대통령에 당선된 시락은 기존 좌파정부의 정책에 반하여 소득세 감면, 공기업 민영화의 가속 등을 추진하였고, 특히 지난 죠스팽 정부의 핵심정책 중의 하나였던 35시간 노동제를 실질적으로 폐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06년 1월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는 '최초고용계약(CPE)'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법안에 따르면 20명 이상의 종업원을 가진 기업이 26세 미만의 젊은이를 채용할 때 2년 동안의 수습기간에는 사유를 밝히지 않고 언제나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기업가에게 주는 것이다.

 

드 빌팽 정부는 이 법이 평균 실업률 10%의 두 배나 되는 청년실업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청년취업자들은 생활의 불안정이 확대될 뿐이라고 강하게 반발하였다. 계속되는 대규모 시위와 총파업 때문에 결국은 시락대통령과 드 빌팽 총리는 CPE 조항을 철폐하고 다른 법안으로의 대체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에의 적응

1990년대 말 이후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의 복지국가 개혁은 상당부분 1984년 이래 사회당이 추진해 온 복지국가의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테랑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2년여 기간 동안 사회주의적 조치를 취하면서 기존의 복지국가를 강화함으로써 이전의 우파정권뿐만 아니라 여타 유럽 국가들의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구별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983년 미테랑 대통령은 프랑스 사회주의의 전환을 모색한다. 사회당의 초기 정책이 프랑스의 경쟁력을 후퇴시키고 1970년대 이후 지속적인 문제였던 실업률의 상승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당 정부는 1982년 7월 임금과 가격의 동결이라는 정책을 수립하면서 전반적 사회주의적 기획에서 선회할 움직임을 보인다. 1983년 1월 미테랑 대통령은 정부의 과도한 개입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정책의 전환을 시작한다.

 

'국유화'를 사회주의의 목표로서 설정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의 도구적 수단으로 취급하게 된 것이다. 새로 수상에 임명된 파비우스는 '국가란 무엇보다도 우선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것이며, 경제발전에 우호적인 조건을 창출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정책을 수행하는 임무를 갖는 것'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이에 따라 경제구조의 근대화라는 목표가 모든 부문을 장악하게 되고 국유화된 기업 역시 채산성의 원칙에 종속된다. 금융시장이 자유화되기 시작하고, 노동에 대한 권리는 고용주와의 타협의 대상이 되고, 사회적 보호 역시 관리의 측면에서 재편되기 시작한다.

 

공공부문에 주어졌던 믿음의 상실에 의해 사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자신의 행위 수단을 스스로 박탈하기 시작한다. 1983년 1월 미테랑 대통령은 "사회전체의 조화를 복원하기 위해" "중간적 길"이 가능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경쟁을 유지할 수 있는 생산을 재건하기" 위해 공공부문과 사적부문의 공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 하에서 첫 번째 동거정부, 즉 우파 내각이 들어선 것은 1986년 의회선거에서 우파의 승리에 따른 시라크 수상의 취임과 함께이다. 시라크는 자신의 경제고문이었던 기술관료 발라뒤르를 재무장관에 임명하고 그를 통해 민영화 계획을 실행한다.

 

1986년 7월 '정부가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과 8월 '민영화 적용양식에 관한 법'을 통해 5년간 65개 기업 - 약 80만 명의 종업원이 이들 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 에 대한 민영화 계획과 그것을 추진할 민영화위원회에 대한 지침을 마련한다.

 

관련법들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들에 한해서 그들의 과도한 투자를 막기 위하여 이들이 취득할 수 있는 전체 주식량은 민영화 대상기업 자본의 20%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비율은 국가이익 보존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 하향 조정될 수 있다고 명시한다.

 

또한 자국 내 투자자들의 주식의 집중을 막기 위하여 핵심주주군(민영화되는 기업의 지배적 지분을 보유하게 되는 소수의 대주주 집단)은 전체 지분의 30%를 넘지 않는 법위 내에서 권고된다. 핵심주주군의 대상에 대해서 민영화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로부터 특정한 선호가 있는지 자문을 구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최종권한은 정부가 지님으로써 정부개입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1997년 우파 시라크 대통령의 의회 해산 후 사회당 죠스팽 정부가 들어선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과 독일에서 좌파내각이 성립되었고, 특히 영국의 블레어 수상이 내건 '제3의 길'과 독일의 슈레더 수상이 내건 '신중도' 노선의 출현은 프랑스 죠스팽 정부에게도 프랑스 사회주의의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유럽 좌파 정권들은 '제3의 길'이라는 새로운 슬로건과 함께 좌파의 쇄신 내지는 복지국가의 개혁이라는 담론을 화두로 제기한다.

죠스팽 정부가 들어서면서 실시한 전반적인 거시정책은 크게 세 가지 방향 사이에서 움직였다. 물론 이것은 사회당 내의 분파들의 영향 및 좌파연합이라는 정권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전통적인 좌파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부유층에 대한 세금 증가, 노동수입에 대한 사회적 부담금의 감소 그리고 자본 수입에 대한 사회적 부담금의 증가를 통해 수입의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한 재정정책, 둘째는 사회자유주의적 조치로서, 실업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노동가격을 낮추기 위한 조치와 오염산업에 대한 세금부과 등이 그것이며, 셋째는 자유주의적 전랴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부담금을 낮추는 조치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잇다.

 

 죠스팽 정부는 각각의 정치적 성격이 뚜렷한 이러한 정책 방향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간접세를 통한 사회적 부담금의 대체. 프랑스의 경우 사회보장제도의 기본적인 재원이 고용주와 임노동자의 기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경제적 부담이 큰 것으로 나타난다.

 

(프랑스의 복지국가 제도는 삼자주의(tripartisme) 원칙에 근거한다. 사회보장보험의 경우 일반적으로 노동자와 고용주가 각각 40%를 부담하고, 나머지 20%를 국가가 부담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대륙형 조합주의 모델로 분류되지만, 프랑스는 전후 영국의 보편주의적 원칙을 수용하려는 경향을 지속해왔다.)

 

그래서 죠스팽 정부는 1997년 9월 이전의 쥐페 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것, 즉 간접세를 통해 일정부분의 사회적 부담금을 충당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즉 모든 수입에 일괄적으로 적용한 '일반사회기여기금(CSG)'을 통해 특히 의료보험의 부담금을 충원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1990년 로카르 정부에 의해 시작되었을 때 CSG의 적용이 공무원의 임금에 한정되었던 것을 자본 수입에 대해서도 확대 - 일정수입에 대해서는 최고 10%까지 부과 - 함으로써, 170억 프랑의 수입을 확보하고 그를 통해 임금노동자의 기여금의 부담을 덜고자 한 것이다.

 

 이 정책은 0.85%의 노동자 실질임금 상승효과를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또한 임금노동자들의 구매력의 상승효과와 연결됨으로써 전체 경제에 대해 일정하게 기여함과 동시에 고용주의 부담을 약화시킴으로써 일정한 고용창출 효과까지 가져온 것이다.


셋째, 사회보장제도에서 선택성의 강화. 프랑스의 사회보장제도 중에서 선택성에 의한 정책이라고 가장 비판받는 부분은 가족수당이다. 전반적으로 1946년 가족수당이 체계화된 이후 그와 관련한 지출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 정부의 정책이 퇴직연금 부문에 집중된 반면에, 사회보장 지출에 대한 가족수당의 비율은 1946년 40%, 1960년 31%, 1990년 13%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가족수당은 형식적으로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직적 불평등화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가족수당이 두가지 종류로 구분되어 있는 것과 관련된다. 평균적으로 중산층이 받는 육아수당(AGED: 가정에서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보모를 고용하는 경우)이 하층이 받는 자녀교육수당(APE)보다 크다는 것이다.

 

전자는 정규직 내지는 숙련된 여성노동자가 받는 것으로 임금의 80% 이상을 보전받게 되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 일반적으로 비정규직 내지는 비숙련 여성노동자들이 받는 것으로 정부가 규정한 최저임금의 65%를 보상받게 된다. 또한 전자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고용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경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제도적 불균등으로 인해 AGED를 받는 여성과 APE를 받는 여성 간의 편차가 지속적으로 확대됨으로써 불평등의 심화를 가져오게 된다.

출처 : 한 숨 돌리고픈 휴게소...
글쓴이 : 리어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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