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스크랩] [애송시 100편-제29편] 김종길 `성탄제` /정끝별·시인
    문학 2011. 5. 24. 08:14

    [애송시 100-29] 성탄제 - 김종길

    정끝별·시인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김종길(81) 시인의 '성탄제'를 읽는 일은 내게 유년의 흑백 사진을 보는 일처럼 애틋하고 살가운 일이다. 겨울밤, 열에 시달리며 칭얼대던 어린 내게 아버지의 코트 자락은 서늘했다. 겉옷을 벗으신 아버지는 물에 만 밥 한 숟갈 위에 찢은 김치를 씻어 올려놓으시고는 아, , 하셨다. 하얀 가루약도 그렇게 먹이셨다. 어머니가 방을 치우고 이부자리를 펴는 사이 오래오래 나를 업고 계셨다.

    산수유 열매는 고열에 약효가 있다. 열에 시달리는 어린것을 위해 산수유 열매를 찾아 눈 덮인 산을 헤매셨을 아버지의 발걸음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할머니가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하고 있으니 아버지 속은 얼마나 더 애련했을까. 흰 눈을 헤치고 따오신 산수유 열매는 혹한을 견디느라 또 얼마나 안으로 말려 있었을까. 눈 속의 붉은 산수유 열매는, 바알간 숯불과 혈액과 더불어 성탄일의 빨간 포인세티아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가 찾아 헤매셨던, 탄생과 축복과 생명과 거룩을 염원하는 빛깔이다. 생을 치유할 수 있는 약(
    )의 이미지다.

    김종길 시인은 명망있는 유학자 집안의 후예다. 한학과 한시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가 선택한 것은 영문학이었다. 우리나라에 영미시와 시론, 특히 이미지즘을 소개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유가적 전통과 이미지즘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명징한 이미지, 절제된 표현, 선명한 주제 의식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를 일컬어 '점잖음의 미학'이라 했던가
    .

    차가운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이 어린것의 열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특히 산수유, 서느런, 성탄제, 숯불, 설어운 설흔 살의 '' 음이 서늘한 청량제 역할을 한다. 그 서늘한 청량제 속 따스한 혈맥이 우리네 가족애일 것이다. 그 따스함은,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그의 시 '설날 아침에'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마음으로 설날 아침을 맞이하자. 매운 추위 속에서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맞이하자. 그 한가운데 가족이 있음을 기억하자.

    입력 : 2008.02.05 21:53 / 수정 : 2008.03.04 17:36

    출처 : 예찬모임
    글쓴이 : 어부 원글보기
    메모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