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스크랩] 헨리 8세의 성공회 전후 역사적 상황(엘리자베스 1세 재위 45년)
    역사 이야기 2012. 11. 29. 15:40

    영국의 종교개혁에 대해 고등학교 세계사 각급 교과서에서는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영국 종교개혁의 발단은 신앙교리의 상이(相異)에서가 아니라 헨리 8세(재위:1509-1547)의 이혼문제와 그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역사적 시대조류와 정치적 국민감정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과 프로테스탄트적 교리의 일부를 수용하고 가톨릭의 전통적 전례의식을 가미한 신구양교의 절충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 가톨릭측에서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너무나 간단한 설명이어서 교과 담당 교사의 설명 여하에 따라 학생들의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본란에서는 좀더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해 개혁과정의 실상과 그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교의(敎義)의 변화없는 종교개혁으로서 당시의 국민국가 건설에 따른 시대적 역사조류와 정치 및 사회경제적 배경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표면적으론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발단이 되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오늘의 영국교회가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영국교회를 성공회(聖公會)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니체아 종교회의(325)에서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로 하고 부(父)인 신(神), 아들 예수, 성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오파를 정통으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 인간으로만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결정하여 교의를 통일하는 신앙고백 가운데 교회에 관한 내용으로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된 사도적인 교회'라고 한 표현을 빌려 성(聖)과 공(公) 두 글자를 합하여 성공회라고 한 것이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이단적 종교개혁을 싫어하였다. 즉 '칠성사(七聖事)의 옹호'를 써서 교황 레오 10세(재위:1513-1521)로 부터 신앙의 옹호자란 존칭까지 받았다. 

     

    이러한 그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탈하게 된 것은 전술한 배경도 크지만 그의 다혈적인 정욕(情慾)을 억제하지 못하고 6명의 왕비를 교체한 이혼문제로부터 발단되었다. 

     

    헨리 8세는 젊고 아름다운 시녀인 엔 볼렌과 결혼할 목적으로 왕비인 가타리나와의 이혼을 제기하였다. 가타리나는 당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스페인의 왕인 칼 5세(재위:1519-1556)의 숙모이자 헨리 8세의 형의 미망인으로서 교회법상 이혼이 불가능하였다. 

     

    결혼 18년간 후계 왕세자가 없음이 이혼 사유로 토마스 울지 추기경의 교섭은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 1523-1534)의 불허로 실패하였다. 이때 울지는 실패의 책임을 물어 단죄(형집행전에 사망)되었으며 헨리 8세는 당시 교황에 대한 국민감정이 나쁨을 이용, 의회를 통한 승인을 결심하였다.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랜머(1489-1558)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 의회를 소집하여 제상 토마스 크롬웰(1485-1540)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1529년 가타리나와의 이혼성립을 승인케 하였다. 이후 영국의 종교개혁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교황청에 대한 금전납부의 금지(국민지지 얻음), 수도원 해산을 통한 토지와 재산의 몰수, 가타리나와의 결혼무효선언과 앤 볼렌과의 결혼승인(1534), 수장령의 발부(1534) 등으로 영국교회는 사실상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물론 교황청은 헨리 8세를 비롯해 앤 볼렌, 크랜머 등을 파문하였고(1534.7), 교회는 국가에 종속되었다. 

     

    부언할 것은 헨리 8세는 6명의 부인을 교체하였는데 2명(볼랜, 하워드)은 처형되었고, 2명(가타리나, 앤)은 이별하고, 1명(시모어)은 출산시 사망하고, 1명(파)은 단죄되었으나 헨리 8세보다 오래 살았다. 

     

    헨리 8세는 1536년 영국교회의 교리 및 예배방식의 기준이 되는 '10신조'를 공포하였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주의와 가톨릭의 중용적 입장을 택하였는데 멜란히톤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매우 흡사하다. 이로 인해 성직자에 대한 포고가 국왕에 의해 행해졌으며 모든 교회는 라틴어 성서 대신 영역서가 채용되고 꼭 비치할 것을 훈령하였다. 

     

    그후 틴달 및 마일즈 커버데일 번역의 성서 개정작업이 진행되어 1539년 대성서로 간행되었다. 이때 '순례자의 반란'의 영향과 칼 5세와 화해의 바람 등으로 '10신조'보다 훨씬 후퇴한 '6신조'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에드워드 6세(재위:1547-1553, 헨리 8세의 셋째 부인 시모어의 아들)치하에서 교회내부의 신앙상의 혁신이 시작되었다. 그의 개혁 작업은 왕의 연소로 서머셋(1506-1552)공의 섭정과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의 협력으로 시작되었다.

     

    즉 1547년 의회에서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함께 사용할 것을 제정하였고, 1539년에 제정된 '6신조'의 폐기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어 복음주의 운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해로 자유를 잃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자유를 회복하고 외국에 망명한 신교도 및 외국의 신교도가 많이 영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마터, 녹스 등의 저명한 신학자가 초빙되어 개혁사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1549년에는 성직자들의 결혼생활이 인정되었고 예배통일령이 공포되었다. 이는 크랜머가 편찬한 '일반기도서(C.P.B.:Common Prayer Book)'로 예배, 의식, 전례 등을 엮어 놓은 것으로 영국교회의 예배형식의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는 법으로 제정되어 라틴어가 아닌 영어 사용이 규정되었다. 그후 크랜머가 학자들의 힘을 빌려 프로테스탄트적 색채가 깊은 내용으로 개정하여 1552년 제2기도서로 발간하였으나 외형은 여전히 보수적인 가톨릭적 색채가 농후하다. 이 기도서는 엘리자베스 때 새로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1562) 영국교회의 기본적인 기도서로 각국의 사정에 맞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1550년에는 교회내의 성화상(聖畵像)이 철거되고 이어 단식도 폐지되었다. 1553년에는 '42개 신조'가 의회에서 공포되어 영국교회의 기초적인 신조가 되었으며 이는 1563년에 대폭 개정되고 1571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1553년 에드워드의 사망과 더불어 모든 프로테스탄트적 개혁은 중단되고 메리(재위:1553-1558)가 즉위하자 가톨릭화로 에드워드 6세 치하의 법률이 폐기되었다.(메리는 헨리 8세의 첫째 왕비인 가타리나의 딸) 

     

    1554년에는 신교박해를 위한 법률이 부활되었고, 1555년에는 헨리 8세의 치하의 교황 반대 법률도 철폐되었다. 이때 교황 바오로 4세(재위:1555-1559)는 영국에 있어서의 과거의 교회재산 반환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의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메리는 1554년 칼 5세의 요망으로 국왕의 아들인 필리페 2세와 결혼하였는데 영국민의 불만이 많았다. 

     

    메리 치하에서의 가톨릭정책으로 많은 영국교회 목사가 교구로부터 추방되었는데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였고 국외 망명자도 많았으며 단죄자도 많았다. 

     

    대표적 인물로 켄터베리 대주교인 크랜머를 비롯하여 런던대주교 리들리, 우스타 주교 라티머 등으로 영국교회의 첫번째의 수난이었다. 이어 메리 사망 후 엘리자베스 1세(1558-1603)가 즉위하자 영국교회제도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엘리자베스는 엔 볼랜의 딸) 

     

    엘리자베스 1세는 국민국가 통일의 입장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타협을 시도하였는데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영국의 독자적인 감독교회제도의 확립이다. 그는 1559년 의회에 헨리 8세보다 온건한 수장령을 승인케 하여 영국유일의 지상의 지배자임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고 의원, 관리 등 모든 성직자도 수장령에 따른다는 서약을 해야만 하였다. 이때 서약 거부자도 많았는데 당시 약 8천명의 성직자 중 약 7백여명이 성직지위를 상실하기도 하였다. 

     

    1559년에 '예배형식통일법'이 전술한 바와 같이 공포되었는데 이는 42개조가 39개조로 개정되었고 1571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현재까지 영국교회의 신조의 기준이 되고 있다. 

     

    영국의 종교개혁배경에는 시대적 역사조류와 정치적, 사회경제적 제요인들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 헨리 8세의 이혼문제는 하나의 표면적인 이유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로마 교황의 강력한 권위하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교황의 권위약화와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국민감정이 배후에서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정치, 사회경제적 변화는 자연 시민계급의 성장을 재촉하였고 농민들의 지위향상은 사회계급의 분화를 촉진하고 특권층에 대한 대중의 불만도 함께 일어났다. 더욱이 영국은 유럽에서도 일찍이 국민정신이 확대되어 14세기에 이미 존 위클리프, 후스 등의 개혁운동이 있었고, 15세기에 들어와서도 존 콜렛, 토마스 모어 등과 같은 계몽주의 운동도 전개되고 있었다. 

     

    더욱이 영국은 헨리 7세(재위:1485-1509)가 튜더왕조를 개창하면서 절대왕조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교회의 막대한 재산의 소유는 절대군주의 절대권확립에 장해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종교개혁은 신앙상에 있어서의 교리문제로 개혁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복합적인 배경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가톨릭과 교회 재일치가 논의되고 있으나 너무나 오랜 세월의 분열은 많은 어려움을 낳고 있다. 

     

    후일 영국이 스페인과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1570년 교황 비오 5세(재위:1566-1572)는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자 1580년부터 영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엘리자베스 1세(재위:1558-1603)의 재위기간 동안 250여명의 순교자도 발생하였고 영국국교회는 완전히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탈하여 독립교회가 되어 후일 일어난 퓨리탄 혁명에 의해 영국의 참된 종교개혁은 마무리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Ellizabeth I)

    http://byjuly.tistory.com/8?srchid=BR1http%3A%2F%2Fbyjuly.tistory.com%2F8


    잉글랜드 여왕 / 앨리자베스 1세
    1533.9.7 ~ 1603.3.24
    헨리 8세의 딸로 영국 절대주의의 전성기와 경제 번영기를 이뤘다.


    ---------------------------------------------------------------------------------------------------------------------------------

    1558.1.15  -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다.

    대관식이 거행된 1월 15일은 매섭게 추웠다. 스물다섯의 엘리자베스는 웨스터 민스터 홀에서 걸어나왔다.
    흰 담비 털가죽으로 안을 댄 실크 망토에 베네치아산 황금과 진주가 달린 진홍색 벨벳 모자로 잔뜩 치장한 채였다.
    교회들은 한꺼번에 종을 울렸고 오르간, 트럼펫 소리와 수 만개 촛불이 성스럽고 화려하게 넘쳐흘렀다.

    ---------------------------------------------------------------------------------------------------------------------------------



    영국에서 16세기는 해외 원정에 돈을 쏟아 붓던 탐험과 모험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최초로 잉글랜드 식민지를 건설했던 월터
    롤리 경과 세계를 항해했던 프렌시스 드레이크 경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처럼 원정에 나선 결과,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여왕을
    기리기 위해 미국 플로리다 북부를 '버지니아(처녀의 땅)'라 명명할 수도 있었다. 이 여왕이 바로 영국의 16세기를 빛낸
    엘리자베스 1세였던 것이다.

     

     

     


      날씬한 몸매이면서도 위엄에 가득 찬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앤은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의 시녀였는데, 엘리자베스를
      낳은 후 1536년 5월 19일 참수당했다. 간통을 스물 두
      차례나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헨리 8세가 참수를 지시했다.
      이어,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취급 받았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의 교육에 까지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여섯 살 때부터 군주로서의 자질을 개발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그녀
      스스로도 ‘그리스, 로마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뛰어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를 자유롭게 쓰고 읽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매일 세 시간씩 역사책을 읽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가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가 낳은 아이였다. 그러나 병약한 에드워드
      가 열다섯 살에 죽어버리자 역시 배다른 언니 메리가 여왕이
      된다. 메리는 헨리8세와 캐서린 왕비 사이에 태어났으며,
      신앙심에 극도로 의존한 결과 신교도를 마구 탄압해 '블러디
      메리(피의 메리)'라 불렸다. 메리는 엘리자베스가 신교를
      믿는 게 아닌가 의심해 석 달간 런던 탑에 가둬버린다. 
      엘리자베스는 런던 탑에서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는데, 
      정쟁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 시골에 콕 박혀 지낸다.

      

     

    엘리자베스의 은둔 생활을 끝내게 한 것이 메리 여왕의 서거였다. 다음 왕위의 승계자로 지목된 그녀는 즉위식 날 두 가지
    영국 왕의 징표를 얻게 된다.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는 백성들과의 결합을 상징하는 반지를 꼈고, 무게가 3킬로그램에 이른다는
    잉글랜드 왕실 왕관을 썼다. 그녀는 당면한 두 가지 안건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바로 결혼과 종교. 첫 번째 문제인
    결혼에 관한 그녀의 결론은 이랬다.

     

    “한 시대를 통치했던 여왕이 평생 처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는
    비석을 세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녀는 처녀 여왕의 전설을 만들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으며
    그 이유 때문에라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대관 이후
    25년간 후계자와 관련해 여왕의 결혼 문제는 끝없는 추론과
    억측 속에 온갖 기기묘묘한 소문을 낳았다. 이미 사생아를
    낳아서 기른다거나 혹은 난잡한 사생활을 즐긴다거나 청혼
    받는 게 취미라거나 몸이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막으로
    둘러싸여 있다거나 혹은 자궁이 기형적인 안드로겐 내성
    증후군 환자라는 등의 소문이었다.
    그녀는 당대의 ‘훈남’
    로버트 더들리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더들리의 아내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에는 특히 소문이 극성을 부렸다.
    여왕이 추악한 살인을 못 본 척하고 더들리와 결혼해
    왕국과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종교에 관한 한 그녀는 언니와 달리 광신도가 아니었고
    신교 구교 가리지 않고 광신적 행위라면 혐오했다. 그녀는
    평생 인간의 양심은 타인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 마음 깊숙한 곳과 비밀스런 생각을
    억지로 들여다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어쨌든 엘리자베스1세
    치하에서 개신교가 잉글랜드 국교가 되었고 그때부터
    종교적인 탄압은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인
    필요에서 이뤄졌다.


     

     

     

     

    엘리자베스1세 여왕은 복잡 다단한 인물이었다. 자신보다 책을 많이 독파한 학자는 거의 없다고 자랑했으며 죽는 날까지 키케로나 플루타르크 번역을 소일거리로 삼았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스물 여섯 시간 내내 ‘철학의 위안’이란 책의 번역에 매달리기도 했다. 라틴어를 말하다가 실수하느니 에스파냐. 프랑스, 스코틀랜드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편이 낫다고 말할 정도로 학문을 사랑했다.

     

     

     


      노골적으로 불경한 욕설을 날릴 배포가 있었고 짓궂은
      장난을 좋아했다. 성적 매력과 자신감으로 남성들을 뇌쇄
      시켰으며,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기 위해 극단적인 몸부림을
      치면서 나이 들어갔다.
    그녀는 궁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말을 듣는 것을 즐겼다. 승마와 사냥,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춤을 좋아했으며, 적게 먹고, 겉 치레에
      치중했다. 노년에도 목이 깊게 팬 드레스를 입었고 아침에
      몸치장을 하는데 두 시간씩을 바쳤다. 가늘고 호리호리한
      몸에 위엄과 수줍음이 적절히 조화된 감탄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란 말을 들었다. 그런 몸에  걸어 다니는게 신기할
      정도로 온 몸을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휘감아 치장했다.

     

      보석에 특히 집착한 그녀의 컬렉션은 단연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보석에는 그녀의 좌우명인 셈페르 에어뎀
      (semper eadem. 항상 같다)을 새겼다. 진주 장신구를
      처녀성의 상징으로 활용한 그녀는 궁정인들에게 철저한
      도덕관념을 강요했다. 난잡한 사생활은 절대 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녀들은 사랑에 빠져도 감히 이를 발설
      하지 못했다. 여왕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 없이
      살 수 없는 여자여서 남자 궁정인들의 관심을 독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이들 남자 궁정인의 역할은 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고귀한 여인을 그저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는 것이었다.

     

    여왕 자신은 알록달록하고 번쩍이는 의상을 입되 시중 드는 여인들은 검은색과 흰색만 입게 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상대방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눈으로 본 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철학을 고수했다. 장난치고 허물없이
    굴다가 쌀쌀맞게 돌변하기도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정치적으로도 어찌나 똑똑한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여자’로 칭해졌다는 것이다.

     

    그녀는 신체적으로는 건강했으되 정신적으로는 신경불안을 앓고 있었다. 죽기 전 마지막 2년간은 정신이 황폐해지고 사는데
    지쳐 뭘 해도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없다고 종종 말했다. 임종을 앞두고 여왕이 의회에서 행한 마지막 연설은 '황금의 연설'
    이라 불리게 된다.
     

     

    “단언하건대 나만큼 국민을 사랑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다. 신께서 나를 여왕으로 만들어 주신데 감사하지만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영광은 백성의 사랑을 받으며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께서 나를 왕좌에 앉히셨다는 점보다 이렇게
    애정을 보내준 백성의 여왕이 되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위험에서 구하도록 하셨다는 점이 훨씬 더 기쁘도다. 내가
    부여한 권한이 백성들에게 불만이 되고, 특권이 탄압으로 여겨지는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린 특권을
    오용하고 남용했던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신께서는 그들의 죄를 내게 묻지 않을 것이다. 왕관은 남이
    쓴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영광스러운 법이며 직접 써보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 신께서 내게 주신 책무를 이행하고 신의
    영광을 드높이며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양심의 명령이 없었다면 나도 이 왕관을 누구에게든 주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날까지만 살아서 통치할 생각이다. 나보다 더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여왕은 이 말을 마치고 의원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게 한 뒤 나팔 소리와 함께 퇴장했다.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 없을 것이다”란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장면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템즈강의 뱃놀이? 셰익스피어 연극 관람? 젊은 날의 연인 로버트 더들리와 춤을 추던
    장면? 인생 최후의 연인 에식스에게 반지를 건네주던 장면? 그를 반역죄로 처형시키고 도저히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날들?  


    여왕 생애 마지막 2, 3일의 모습은 어땠을까? 엘리자베스를 
    돌보던 사람들은 그녀가 치료를 받으면 더 살 수 있을 것 같이
    보였지만 치료를 끝내 허락하지 않고 알약 하나 먹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던 3월 밤
    엘리자베스 여왕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깨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그 모습은 ‘양과 같이 순하고 다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평온했다고 전해진다.

     

    1603년 3월 24일 목요일 새벽 3시가 되기 전. 하늘이 또 다른
    새벽을 준비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재위 45년간 잉글랜드는 극빈국에서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잉글랜드 해군은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를 격파해 경외의 대상이 되었고 종교적 화해도 이루었다. 물론 실패도 있었지만 그녀의 후계자가 된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신하들은 종종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 같다. ‘다시 그녀와
    현실에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엘리자베스
    1세의 서거 이후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왕과 의회는 정면
    충돌하게 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엘리자베스1세 시절의
    향수에 젖게 되고 그녀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신화가 된다.
    그녀의 이름이 내뿜는 광명은 절대 망각에 묻히지 않는다.



     

     

    앨리슨 위어의 <엘리자베스 1세>(루비박스)
    비운에 목숨을 다한 ‘천일의 앤’을 어머니로 둔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어떻게 튜더 왕조 최고의 황금시기를 만들어갔을까? 탐험과 모험과 설레임의 시기. 그 행복하고 복잡하고 분주하고 생명력 넘쳤던 시기를 손에 잡힐 듯 그려준 책.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5811434');
    출처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어린양의 아내)
    글쓴이 : 선한 사마리아 원글보기
    메모 :
Designed by Tistory.